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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李 대통령과 정조대왕

시계아이콘02분 24초 소요

왠지 우수(憂愁)에 젖어도 될 것만 같은 날, 멀리서 날아 온 편지 한통을 뜯어보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절기상 우수(雨水)이기에...


청와대의 한 행정관이 경찰청 간부에게 보낸 e메일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로 부각될 여지가 보입니다. 처음엔 그 메일의 존재여부를 부인했던 청와대가 결국 개인적인 문제라고 시인하는 어색한 상황. 공식적으로 ‘보냈느냐 안 보냈느냐’의 시비도 중요하지만, 그걸 시행하고 또 공개한 경찰청의 이중적 행태도 비난받아야 되겠죠.

무려 214년 전에 정조대왕이 예조판서 심환지에게 보낸 친필서찰들도 요즘으로 치면 자주 e메일을 보낸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언론에 공개되었던 서찰의 대부분은 왕의 속마음을 담은 지극히 사적인 내용이라서, 실은 그렇게 오픈하는 건 왕에 대한 도리가 아닙니다.


역사적가치가 있고, 고인(故人)의 소장품이라고 하여 후손들이 함부로 일방적으로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 우리가 상대에게 편지를 보낼 때, 그가 후일 제3자에게 보여줄 것을 예상한다면 진심을 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에 공개된 왕의 편지라는 핑계로 하나만 몰래 봅시다.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아버지를 애타게 불러대었던 유년시절의 추억과, 홀로 된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피맺힌 아픔을 위무하며 성장했던 효자. 그가 사도세자를 죽게 한 할아버지 영조에 대한 원망을 가슴에 묻은 채, 마침내 왕이 되어 당파를 초월하여 선정을 펴기까지 얼마나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했겠습니까.


1797년 10월 7일자로 멀리 금강산에 머물고 있는 원로대신에게 보낸 서찰의 첫 구절을 보면, 차라리 연인에게 보내는 연서에 가깝습니다.


“헤어진 뒤로 어느 덧 달이 세 번 바뀌고 50일이 지났는데. 그리운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다. 잘 지내고 있는가?”


50일이라면 일수로 두 달도 채 안 되지만, 왕은 달력을 쳐다보며 애타게 지나간 날을 꼽고 있었던듯 하죠. 8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말입니다.


“나는 일을 보느라 바빠 잠깐의 틈도 내기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午時 오전 11-오후1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밥을 먹으니...정력이 갈수록 소모될 뿐이다.”


49살까지 밖에 못살았던 왕은, 한창이어야 할 46세에 68세의 노신 심환지에게 쇠잔해지는 정력을 하소연했을 정도로 처결해야 할 정사의 무게에 짓눌렸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쌓인 서류더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매끼 진수성찬은커녕 아침은 거른 채 하루 두 끼만 마지못해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토로하고 국정을 상의할 정도로 가까운 신하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때는 10월7일, 얼마나 좋은 계절입니까. 청량한 가을밤에 정조는 귀뚜라미 소리도 못 듣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다스리면서도 고작 등잔불 아래서 침침한 눈을 부비며 붓을 들어 결재서류를 넘기고 있었습니다. 때론 내전을 서성거리면서 지나간 날들을 회고했던 지극히 감성적인 대왕. 아무도 터놓고 말할 동무가 될 수 없었던 절대 권력자의 절대고독으로 인해 단명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위의 편지를 쓰기 5개월 전인 그해 4월10일. 어찰이 다른 대신들에게도 자주 공개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보낸 실망의 서찰 한 통을 볼까요.


“나는 이처럼 경을 격의 없이 대하건만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이후로는 경을 대할 때 나 역시 입을 다무는 것 외는 다른 방법이 없다. 우스운 일이다.” 라고 호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떡을 먹고 이 말을 참아라.”는 속담을 예로 들었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그 서찰을 받은 심환지는 어디서 떡만 보면 저절로 용안이 떠올랐을 테지요.


산천초목들이 다들 봄바람을 타고 맘이 설레는 계절인데도, 왕은 입이 가벼운 신하를 먼 곳으로 보낸 탓에 한없이 외로움을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감히 군왕의 내밀한 서신을 사사로이 공개한 신하의 처신에 대로할 법도 한데 말입니다. 크게 섭섭한 마음을 먹물에 듬뿍 적신다음, 다시 서찰을 보내 꾸짖는 정조의 대응을 보면 당당한 왕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18세기의 경복궁에서 격무에 시달렸던 정조의 심경과, 한 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통령 못해먹겠다”며 측근들에게 메일을 발송하던 盧 대통령의 답답한 심정과, 지금 청와대에서 李 대통령이 겪는 일상의 고뇌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 Old Partner >는 화제의 영화 <워낭소리>의 영어제목으로, 거기서 들려주는 메시지도 비슷합니다. 마음을 알아주는 ‘오랜 파트너’가 사라진 세상에서 불현듯 느끼는 허전함. 나무그늘에 앉아서 소가 남긴 쇠방울을 들고 추억에 잠기는 쪼그라지고 왜소한 농부의 처지와, 정조대왕의 말년이 인생무상과 권력무상으로 비슷합니다.


왕과 대통령이란 신분은 겉으론 한번 누려보고 싶은 부러운 대상이지만, 民生이 고달프게 되면 정조대왕이나 李 대통령이나 잠도 맘대로 못자는 고달픈 존재이긴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인민들이 배를 곯아도 자기 생일상은 꼭 제대로 챙겨 받고, 고집스레 제 할 일만 하는 지도자도 있긴 합니다. 새 정부 출범 1주년을 앞두고 축하화분을 못 보낼망정 미사일 발사준비를 하는 영화광 김정일 위원장에게 <워낭소리> CD를 한 장 보내보면 어떨까요?






시사평론가 김대우(pdikd@hanmail.net)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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