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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머리에서 가슴까지

시계아이콘02분 29초 소요

일본은 흔히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표현합니다. 머리와 가슴도 그런 사이입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거리는 30cm에 불과합니다. 강남성모병원에서 6개월째 투병 중인 김수환(87) 추기경은, 그 짧은 거리를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 년 걸렸다.”


그럼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추기경 모습을 한번 볼까요. 추기경도 2002년 월드컵을 즐겨 보았습니다. 그해 여름 뜨거운 열기 속에서,자신도 모르게 ‘붉은악마’로 변해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천주교단의 최고 어른이니, 군중 속에 섞여서 남들처럼 뛰고 박수치기엔 좀 그랬을 것입니다. 숙소에서 혼자 TV를 보며 경기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문제는 한국 팀이 슛~골인을 하는 순간입니다. 다들 일어나서 소리치고 울고불고 뛰어오르며, 온 나라가 난리를 치는데 추기경도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인지라 무언가 그 격한 기쁨의 감정을 표현해야만 했을 겁니다.


그는 한국 팀이 골인을 할 때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걸린 태극기 앞으로 가서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말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후 돌아와서 다시 그 장면을 시청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매번 한국이 골만 넣으면 몇 번씩 태극기 앞에 섰던 분입니다.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순박하신 추기경의 축하 세리머니가. 실은 예전부터 추기경은 자화상 아래에다 ‘바보야’라고 적어두고 자주 그 앞에 서서 바보가 되길 자청했다고 합니다. 끝없이 자신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신 분의 일상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또 그 분이 서울구치소 재소자 집전 강론 중에 한 말. “마산 주교(主敎)시절 사형집행을 참관했는데 집행 도중 기구가 부서지는 바람에 사형수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다들 사형수가 어디로 사라졌냐고 궁금해 하는데, 사형수가 웃으면서 다시 나타나서 수리되는 사형대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관하는 사람들은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사형수는 오히려 내게 시간이 몇 시냐고 물으면서 30분 후에는 하늘나라에 가서 주교님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형수로부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 슬픈 코미디 같은 반전(反轉)을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1992년 대우자동차에서 ‘추기경이 티코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티코를 구입했다’는 카피의 신문광고를 내는 걸 허락할 정도로 국민들과 거리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촛불집회의 발원지였던 명동성당. 갈 곳 없는 수배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 의지했던 그 성지에 늘 추기경이 계셨습니다. 민주화투쟁의 절정기엔 추기경 한 사람의 무게가 백만 군중과 맞먹었고, 때론 침묵도 천금 같은 위력을 지녔던 적이 많았습니다.


대통령선거 때마다 그의 한 마디를 얻어가려는 후보들이 참 애처롭게도 보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대통령 앞에서 가장 긴장하지 않는 인사로도 공인된 분입니다. 매일 모시는 든든한 하느님이란 배경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한번은 문민정부시절 원로로 초청되어 기다리다가, 김영삼 대통령 의자에 바꿔 앉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고 합니다. 황당한 표정의 비서에게 추기경이 한 답이 의외였습니다. “내가 사진 찍으면 얼굴 이쪽이 잘 안 나와서...”


할 수 없이 자리를 바꾸는 대신 반대편에서 사진 찍는 것으로 해결했는데, 추기경의 눈엔 대통령자리가 그저 하나의 의자로밖에 보이지 않았겠죠. 그때 추기경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진짜 문민정부’란 소리를 들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굳이 대통령의 입으로 국회의 형편없는 몰골을 질타해야할 만큼, 대한민국을 위해 바른 말을 해줄 큰 어른과 스승이 없는 현실이 더 문제입니다. 그동안 나라의 원로들이 할 역할을 제대로 주지도 않았고, 또 나설 공간도 예전보다 점점 좁아지는데...
연초에 직접 문병을 갔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수환 추기경이 남겼을 말.
그게 참 궁금하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추기경이 말한 인생덕목 9가지를 그대로 옮겨봅니다. 실천하기가 결코 어려울 것 같진 않은데 말입니다.


一.말 (言)
말을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양 귀로 많이 들으며, 입은 세 번 생각하고 열라.


二.책 (讀書 )
수입의 1%를 책을 사는데 투자하라.
옷이 헤지면 입을 수 없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三.노점상 (露店商)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
그냥 돈을 주면 나태함을 키우지만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


四.웃음 (笑)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 치료약이며,
노인을 젊게 하고 젊은이를 동자(童子)로 만든다.


五.TV (바보상자)
텔레비전과 많은 시간 동거하지 말라.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마약에 취하면 이성을 잃지만
텔레비전에 취하면 모든 게 마비 된 바보가 된다.


六.성냄 (禍)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
화내는 사람은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


七.기도 (祈禱)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 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다.
기도는 자성을 찾게 하며 만생을 유익하게 하는 묘약이다.


八.이웃 (隣)
이웃과 절대로 등지지 말라.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이다.
이웃이 나를 마주할 때
외면하거나 미소를 보내지 않으면
목욕하고 바르게 앉아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 봐야 한다.


九.사랑 (慈愛)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 년 걸렸다.”






시사평론가 김대우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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