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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일왕은 정말 전범이 아닌 허수아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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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일왕은 정말 전범이 아닌 허수아비였을까? (사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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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나루히토 일왕의 성대한 즉위식을 두고 일본 내외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왕은 즉위식에서 세계평화를 바란다고 발언했지만, 옛 제국시대를 연상케하는 전통복장과 예식, 1700억원 이상의 예산을 쏟아부은 호화로운 왕의 즉위식을 두고 군국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만큼 일왕은 제국시대와 전쟁, 그 자체의 상징물로 오랫동안 각인돼왔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일왕은 1192년 가마쿠라 막부 창립 이후 700년 가까운 세월간 허수아비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와 태평양 전쟁기 일왕이 과연 전범으로의 혐의가 전혀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현 일왕의 할아버지이자 태평양전쟁 당시 일왕인 히로히토(裕仁)의 전쟁 개입 여부는 계속해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사안이다.


일단 당시 일왕은 일본제국 헌법 11조에 근거해 군 최고 통수권자였다. 만주사변 이후 그가 재가한 수많은 결정들은 태평양전쟁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로인해 태평양전쟁 당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던 영국의 경우에는 히로히토는 전범이며, 종전후 처형돼야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히로히토가 군부에 휘둘린 것인지, 군부를 이용한 것인지를 두고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일왕은 정말 전범이 아닌 허수아비였을까? 즉위식 행사용으로 쓰이는 단상인 다카미쿠라(高御座)에 시립한 일왕의 모습. 일제강점기인 1913년 다이쇼(大正) 일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사진=AP연합뉴스)


1931년 만주사변 때도 관동군의 독단적인 만주 침략행위는 일본 내각의 의결없이 행해진 일이었지만 일왕은 이를 묵인했으며, 계속되는 군부의 쿠데타 기도에 대해서도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은 물론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잔혹한 전쟁범죄에 대한 보고 역시 받았음에도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0년 나치 독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과 추축국 동맹도 재가했으며 진주만공습도 최종적으로 어전회의에서 재가한 것은 히로히토였다.


패색이 이미 짙어진 1944년 말까지도 히로히토 일왕은 칙어를 내려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뜻을 계속해서 밝혔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에야 항복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내각이 총사퇴하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1945년 8월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이 들어오자 '특수위안시설협회(RAA)'라는 연합군을 대상으로 한 매춘행위를 할 매춘부들을 모집하는 내각의 결정도 재가했다. 철저한 보도통제 속에 그의 전쟁범죄는 모두 지워졌고, 항복과 관련한 책임도 모두 내각과 군부가 지게됐다.


[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일왕은 정말 전범이 아닌 허수아비였을까? 태평양 전쟁 당시 왕위에 있었던 일왕 히로히토의 1928년 즉위식 때 모습. 만주사변부터 각종 일제의 침략에 그의 재가가 들어갔으나 전후 그의 전범은 모두 군부와 내각에게 덮여지게 됐다.(사진=위키피디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도 일왕의 전범 행위 세탁에 크게 일조했다. 1945년 9월18일 미국 상원에서 히로히토 일왕을 전범으로 기소해야한다는 결의안이 제출됐으나 맥아더와 그 측근들이 극구만류했다. GHQ에서는 히로히토를 상징적인 입헌군주이자 일본 통치의 최대 협력자로 두어 배후에서 전후 일본을 통치하는 '블랙리스트' 작전이 계획 중이었다. 이에따라 히로히토는 매우 온건한 사람으로 뒤바뀌었고, 모든 책임은 무능하고 호전적이던 군부와 군부에 끌려다니던 내각이 책임지게 됐다.



결국 전후 전범들의 재판인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일왕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전범 명단에서 아예 빠졌다. 더군다나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동아시아에서도 냉전으로 공산, 자유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면서 일본은 1952년에 연합군 점령이 끝나고 국권이 회복됐다. 이후 일왕과 왕실은 전범문제와 관련해 완벽한 면죄부를 받게 됐다. 전쟁 당시 5000만 자국민을 전화에 빠뜨리고 아시아 각국민들에게 침략의 상흔을 남겼던 일왕은 이에 대한 아무런 책임없이 오늘날까지도 일본의 국가적 상징으로 남게 됐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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