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호의 클래식 라운지]이탈리아에는 두 번의 화재에도 부활한 '불사조 극장'이 있다

세계의 오페라 극장들

베니스의 중심 산 마르코 광장의 희극 가면 차림 배우

17세기 베니스 주도, 한 도시권서 15개 극장…18세기 나폴리·19세기 밀라노·로마에 뺏겨베니스 '라 페니체' 1836년·1996년 큰 화재 발생…시민들 범인 체포보다 극장 재건에 더 큰 의지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보다 관광수익 더 많아…롯데 쾌척 부산 오페라하우스 건축기금 해법은'서양음악의 아버지'는 바흐, '교향곡의 아버지'는 하이든으로 교육을 주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오페라의 아버지'는 음악 교과서로 전해지지 않았다. 기원은 있지만 주창자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1607년 초연된 '오르페오'를 쓴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년-1643년)를 사실상 최초의 오페라 작곡가로 보지만, 1597년경 피렌체의 바르디 백작가의 작은 방(Camerata) 모임에서 자코포 페리의 '다프네'가 공연됐다. 불운하게도 다프네는 악보로 전해지지 않아 페리가 명실상부한 오페라의 아버지로 등극할 기회는 앞으로도 없다.그러나 오페라 종주국의 자존심은 오직 이탈리아에만 허락된다. 쇼 형식의 몬테베르디 스타일이나 낭창 중심의 페리, 로마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선호한 유사 오라토리오를 쓴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1550년-1602년) 작품 모두 이탈리아 반도 안의 도시 국가에서 기원하고 경쟁하면서 발달했다.그중에서도 오페라 문화를 선도한 곳은 17세기 초 경제적으로 번성한 항구 도시 베니스였다. 1637년 산 카시아노 극장이 개관했고, 살롱과 궁정을 벗어나 유료 입장객을 받고 오페라를 상연하는 관습이 시작됐다. 1720년대까지 베니스의 신흥 부호들은 해상무역으로 쌓은 풍부한 재산을 오페라와 극장 제작에 투자했다. 베니스 주변의 파두아에도 극장이 지어졌고 한 때 도시 권역에만 약 15개 오페라 극장이 생길만큼 돈이 극장 주위에 돌았다. 명실상부 오페라의 메카는 베니스였다.

물의 도시이자 오페라 부흥의 발상지 베니스

베니스에 머무는 동안 맛보는 행복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선 느낄 수 없는, 바다를 향해 모든 것이 활짝 열려있는 기분 좋은 개방감의 도시다. 예술가뿐 아니라 거주민 모두가 도시의 주인공임을 느끼게 한다. 동방무역으로 한껏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의 나르시시즘은 특별한 경관을 배경으로 극치를 달렸고 해방구는 오페라였다.원래부터 베니스에선 가면을 쓰고 축제를 벌이는 카니발이 발달했고, 배우들이 고대 희곡을 재현하는 코메디아 델아르테가 유행했으며,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 코러스가 탄탄한 실력을 갖췄다. 오페라가 붐을 이룰 수밖에 없는 기반이었다.오페라 수도의 헤게모니는 18세기 들어 베니스에서 나폴리로, 19세기 들어 밀라노와 로마로 옮겨갔다. 이미 오페라의 패권을 잃었지만 베니스는 도시의 자존심을 지켜줄 상징으로 1789년 '불사조'를 뜻하는 라 페니체(La Fenice)극장을 지었다. 처음엔 화재로 소실된 산 베네데토 극장을 대체할 공간이었지만, 로열박스를 없애고 좌석 간에 차이를 두지 않는 설계는 당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뚜렷했다. 로시니, 벨리니, 도니제티의 신작을 꾸준히 초연하면서 유럽을 대표하는 주요 극장으로 지위를 확립했다.1836년 대화재로 극장의 대부분이 소실됐지만 1년 만에 외형을 회복했고 베르디의 중기 걸작인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를 초연하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극장으로 우뚝 섰다. 위기는 20세기말에도 찾아왔다. 1996년 1월29일, 보수작업의 대금을 받지 못한 전기 공사업자의 방화로 잿더미가 됐다.시민들은 원인 규명이나 범인 체포보다 재건의 의지를 앞에 내세웠다. 소실 이전의 자료를 찾아 나섰고,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 '여름의 폭풍(1954년)' 영상을 참고해 극장의 샹들리에를 복원했다. '인테리어가 이전보다 밝아졌다', '음향이 열화됐다'는 소소한 비판이 있지만 2003년 무티가 재개장 공연을 지휘한 뒤 라 페니체는 21세기 베니스를 알리는 얼굴이 됐다. 지금은 서울시향을 떠난 정명훈이 라 페니체에서 핵심 프로덕션을 지휘하고 있다. 목조건물 탓에 화마로 오페라극장이 재로 변한 사례가 많지만, 라 페니체는 시민의 성원으로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1959년 착공되어 1973년 준공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20세기 근대 건축물을 대표하는 호주의 랜드마크다. 미항을 배경으로 요트의 돛을 연상시키는 하우스의 외관은 관광객의 단골 촬영 장소이자 현대적 의미의 세계유산이다. 오페라하우스는 2700석의 콘서트홀과 1500석의 오페라극장, 500석 규모의 드라마 극장이 함께 위치한 콤플렉스 구조다. 그러나 정작 클래식 음악가들에게는 형편없는 어쿠스틱으로 악평이 난 곳이다.1940년대말 지휘자 유진 굿센스의 주도로 시드니에 대형 콘서트홀을 만들자는 운동이 부흥했고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 인가를 받아 건축 설계경기를 개최하면서 공사는 시작부터 부산하게 진행됐다. 당시 공법으로 구현이 쉽지 않은 조개껍질 모양의 셸(Shell)로 지붕을 완성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외관을 완성하고 내관을 정비하면서 공사단가는 하염없이 올라갔고 시민의 세금은 무한정 투입됐다. 당초 700만 호주달러를 예상했지만 지방 정부의 집권당이 바뀌고 설계자가 바뀌면서 비용은 1억200만 호주달러까지 치솟았다. 최초 예상액의 열네 배 이상이 들었다.목표로 한 시점보다 10년 늦게 개장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현재 연간 200만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가 됐다. 관광객이 관람한 공연의 티켓 수입보다 기념품점과 식당에서 쓰고 간 비용이 더 잡힐 만큼 호주 관광 산업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애초에 극장을 만들 때는 크게 기대하지 않은 수입이다.하버 브리지와 미항을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부가 이득이다. 호주정부가 2000년대 중반 2500억원을 들여 오페라하우스 일대를 대대적인 리노베이션한 것도 관광객 유치가 주된 목적이었다. 세계 오페라 지형도에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비중은 정상권 오페라 가수들이 잠시 휴양 겸 노래를 부르러 가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반드시 신축 오페라하우스가 공연 수준에서 초일류를 지향하지 않아도, 충분히 생존할 법한 모델을 제시한다.

부산 오페라하우스 조감도

롯데가 원도심 재개발 이익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쾌척한 오페라하우스 건립 기금 1000억원을 놓고, 항도 부산의 여론은 찬반으로 갈렸다. 연간 250억원으로 예상되는 운영비를 과연 시민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 온당한지, 현 오거돈 부산 시장은 공론화 과정을 진행 중이다. 오페라 극장 목적으로 그대로 짓자는 의견, 다목적홀로 쓰자는 대안, 기금을 야구장 신축에 쓰자는 주장이 혼재됐다.2003년 제일모직 부지 개발의 환원으로 삼성이 대구오페라하우스를 지어 대구시에 기부 채납한 사례를 부산에 지금 그대로 적용하기는 무리다. 운영비를 매년 자발적으로 부담한다는 시민의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경제적 풍요를 누린다고 갑자기 훌륭한 악단을 보유하지 못한 산업혁명기의 영국 사례가 21세기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반복된다. 2018년 부산에는 17세기 베니스처럼 오페라를 지원하는 부르주아 그룹이 없다. 혹여 오페라극장에 불이 났다고 좋은 시절을 복원하자는 과거도 없다. 20세기 중반, 여야의 분쟁 속에 건물은 누더기가 됐지만 우연치 않게 관광 소득을 맛본 시드니가 부산 오페라하우스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2018년 항구를 둔 도시에 오페라하우스는 무엇인가.한정호 객원기자, 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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