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에어컨은 가족이다
기사입력 2018.09.05 09:07최종수정 2018.09.05 09:07
김병민 과학저술가 극한의 더위가 한반도를 찾았습니다. 110년 만이라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1908년 이전에 태어난 분이 모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으니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난생 처음으로 겪은 더위라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불볕더위는 노모에게 8년 전에 새로 놓아드린 에어컨을 켜게 했습니다. 에어컨을 설치하던 날에 시험 동작한 이후로 '전기세(전기료)'가 무섭다며 단 한 번도 켜진 적이 없던 에어컨이 동작한 겁니다. 염천은 노모의 고집마저 꺾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더위를 잊으려는 사람들의 재치 있는 글이 올라왔죠. 그중에 서울시립과학관장님의 글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바로 에어컨은 가족이라는 겁니다. 노모의 집 거실에 장식처럼 서 있던 에어컨이 이제는 자식인 저보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가족이 된 겁니다. 폭염은 호텔이나 회사에서 에어컨 바람을 마음껏 즐기는 호캉스와 회캉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습니다. 휴가철인데도 사무실은 한산하지 않고 도심은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는 열이 더해져 열섬이 됐습니다.

사실 이번 더위로 인한 온열 질환으로 마흔여덟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만약 에어컨이 없었다면 더 끔찍했을 겁니다. 분명 에어컨은 인류를 구해낸 발명품이 맞습니다.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할 만큼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 됐지요. 하지만 인류에게 쾌적한 공기를 선물한 에어컨은 식힌 열만큼 또 다른 열을 방출하며 도심을 데우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절대 손해 보거나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혜택을 누린 열은 그만큼 자연으로부터 갚아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에어컨은 인류에게 신의 선물일까요, 아니면 달콤한 유혹일까요?

오늘은 에어컨의 과학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인류가 삶의 터전을 쾌적하게 만들기 위해 온도를 낮추려는 시도는 꽤 오래전에도 있었습니다. 고대 로마인과 중국인들은 벽 뒤에 수도관을 이용하고 연못에 팬을 설치해 찬 공기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지요. 18세기 인류는 물질의 상태 변화를 과학적으로 이해했고 상태 변화에는 열이 개입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에어컨은 열의 이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며 전자기학으로 유명한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는 압축된 암모니아 액체가 낮은 압력에서 기체로 바뀌며 주변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휴대용 부탄가스에서 나오는 기체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사실 현대의 모든 냉각 기술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후 인류의 냉각 기술은 조금씩 진보했습니다.

미국의 한 공학자가 전자식 공기 조절기를 발명했습니다. 그는 1901년에 코넬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난방기를 만드는 회사에 취직해 목재와 커피콩을 건조하는 난방 장치 개발을 맡았습니다. 냉방과 난방의 핵심은 열입니다. 그는 난방 장치에서 뛰어난 기술을 발휘했고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개발팀장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뉴욕에 있던 한 출판사로부터 습도 조절기 개발을 의뢰받았습니다. 바다 근처에 있던 출판사는 여름의 고온과 습기 때문에 종이가 변형돼 출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출판사의 운명이 달린 문제였지요. 그는 공기를 조화롭게 '컨디셔닝(Conditioning)하는' 장치를 만드는데, 이 전자 장치가 최초의 에어컨으로 인정받는 것은 온도 조절은 물론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열을 냉각하는 기술을 개발합니다. 물론 이 장치도 패러데이의 냉각 시스템에 기초했지요. 이후에 그는 수많은 실험과 개선으로 특허와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가 다니던 회사가 군사 물자 생산에 집중하자 회사를 그만두고 에어컨 전문 회사를 차렸습니다. 이 회사의 이름이 '캐리어엔지니어링'입니다. 바로 지금의 캐리어코퍼레이션이라는 회사의 전신이지요. 이제 이 공학자가 누구인지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는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인류에게 큰 선물을 한 윌리엄 하빌랜드 캐리어입니다.

에어컨의 원리는 기화열에 의한 공기의 냉각입니다. 에어컨은 액체가 기체로 기화하기 위해 열을 흡수하고 다시 액체로 액화할 때 열을 방출하는 원리에 착안해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냉장고도 에어컨과 마찬가지로 기화열을 효율적으로 얻기 위한 냉각 순환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냉장고에도 기화열을 얻기 위한 적정한 기체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8년 만에 켠 노모 집의 에어컨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8년 동안 내버려둔 에어컨에는 냉각용 기체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어컨 기체를 충전하기 위해 서비스 신청을 해도 며칠이 걸리더군요. 아마도 대부분 가정에서 에어컨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초기 에어컨의 냉각 기체로 독성의 암모니아나 염화메틸 등이 사용됐고 1920년대에 인체에 안전한 프레온 기체가 개발됐습니다. 하지만 프레온은 성층권까지 도달해 대기의 오존층을 함께 파괴했습니다. 냉매만 친환경으로 바꾸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요? 사실 에어컨은 전기가 없으면 동작하지 않습니다. 결국 전기 에너지를 만들기 위해 화석 에너지가 필수적입니다. 온실가스 증가로 더워지는 생활환경을 조절하기 위해 에어컨 가동을 늘려야 하고 또다시 온실가스를 내뿜어야 하는 악순환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이유로 전기가 필요 없는 냉방 장치가 등장했습니다. 한동안 인터넷에 퍼졌던 페트병 에어컨입니다. 심지어 공중파에서 전문가를 내세우고 실험까지 했습니다. 공기가 페트병을 통해 좁은 병 입구를 통과하며 압력이 낮아지고 속도가 빨라질 때 주변 온도가 낮아진다는 냉각 기관을 만든 겁니다. 무려 실내와 방 안의 온도가 5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차이가 나려면 실제 페트병의 입ㆍ출구를 지나는 공기 온도의 차가 10도 이상 나야 합니다. 웃음거리로 끝난 유사과학이었지만 그만큼 냉각으로 인한 에너지 문제와 지구 환경의 심각성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공식적인 평균 기온도 1973년 기상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높았습니다. 평년보다 2도 정도 높았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40도에 육박하고 한밤에도 30도에 가까운 열대야가 한 달 이상 지속됐는데 평균 기온이 2도밖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워 보입니다. 사실 평균 온도의 2도 차이면 엄청난 변화입니다. 우리가 느꼈던 온도는 국지적 변화지요.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에서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상승을 유지하기로 협약했지요. 현재 겨우 1도가 상승한 상태인데도 전 세계적으로 기상 이변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립기상과학원이 기후 변화 모델로 예측한 2100년의 지구는 그야말로 찜통 지구입니다. 북극의 얼음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죠.

우리는 지구 위 세계가 국가 간 산업과 환경, 정치와 경제 등으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평생 경험해보지도 않을 세계일 수 있습니다. 파리협정은 잘 알지만 협정을 맺은 장소 근처에 가본 적도 없고 서민의 삶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우리의 삶은 현재 대한민국, 일터와 동네에서 동료와 이웃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다른 세계가 우리 자신으로 가까워지는 매개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작은 실천에 대해 막연하게만 느낀다는 겁니다. 온실가스가 탄소 배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절감을 위해 관여하거나 책임을 지는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으니 방치하거나 방임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까요? 더워도 참고 덜 켜야 할까요? 환경 문제는 이익을 보는 사람과 피해를 보는 사람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원하게 여름을 보냈지만 우리의 후손은 더 뜨거워진 지구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무언가 정의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은폐된 부분에 무감각해집니다. 예를 들면 농업이 기계화되며 식량이 풍성해졌고 농업에 이바지한 가축은 거대한 식자재로 둔갑해 공장에서 대량으로 길러지고 도축되고 가공됩니다. 거미줄처럼 얽힌 물류 덕택에 언제 어디서나 풍부한 식량과 물자를 손에 쥐게 됩니다. 우리 생활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리에 오기까지 엄청난 화석 연료가 소비된 것이죠. 한 사람이 플라스틱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자동차를 덜 타고 쓰레기를 줄인다고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 행동의 변화가 언젠가 거대 차원에 영향을 미칩니다.

올해 더위는 여름의 상징인 매미 소리마저 잠재웠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매미의 침묵으로 조용한 경고를 보낸 겁니다. 이제는 에어컨을 켜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진정 에어컨을 가족으로 맞이하려면 그만큼 자연을 위해 겸손하게 또 다른 수고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김병민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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