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한국유사]건너지 못한 바다

246명의 孤魂, 귀국선과 함께 대한해협에 지다

1944년 일본은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국민징용령'을 발령했다. 일본의 노동자 동원은 1939년부터 시작된 모집 방식, 1941년부터 시작된 관알선 방식, 1944년부터 시작된 징용 방식 세 가지가 있었다. 아시아ㆍ태평양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일본은 모집이나 관알선 방식으로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1944년에 '징용영장'이 발급됐고 조선 청년들은 일본 각지로 연행됐다.징용영장에는 징용 대상자의 인적사항과 일본에서 일할 장소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출두할 날짜가 명시돼 있었다. 갑자기 징용영장이 집으로 날아와 무조건 지정된 장소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가족에게 노역 임금의 절반을 송금한다"는 설명도 있었지만 실제 임금은 한 푼도 지급된 적이 없다.일본 히로시마의 미쓰비시 중공업에도 강제 징용된 조선인 수천 명이 있었다. 미쓰비시에 징용된 이들은 당시 주로 경기도 평택, 안성, 경성(서울)에 거주했던 사람들이다. 대부분 1923년 생으로 만 21세였다. 대개 노부모를 모시고 처자식을 부양해야 했던 가장들이었다.미쓰비시 중공업은 히로시마 간논(觀音)과 에바(江波) 지역의 앞바다를 매립한 부지에 공장을 세웠다. 터빈과 보일러를 제조하는 히로시마 기계제작소와 전쟁 시 표준선을 건조하는 히로시마 조선소를 세웠다. 1945년 7월 말, 미쓰비시 중공업의 간논과 에바 공장에는 1만1833명이 재적돼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인 징용공이 약 2800명이었다.당시 미쓰비시에는 동서남북으로 나뉜 숙소가 있었다. 동숙소와 남숙소에는 일본인이 기숙했고, 서숙소와 북숙소에 조선인이 기숙했다. 숙소는 2층 목조로 된 긴 건물이었고, 주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조선인 숙소 출입구에는 파출소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감시당했다.숙소에서 개인은 다다미 한 장(90×180㎝) 크기의 공간을 할당받았다. 중대와 소대로 편성돼 관리됐다. 휴일은 월 2회밖에 없었으며, 외출할 경우 소대장에게 보고한 후 외출해야 했다. 물론 단독 행동은 금지됐다. 지급된 담요는 헌 헝겊을 이어 누빈 것으로 얇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추위에 떨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건더기가 거의 없는 일본 된장국과 단무지, 감자나 고구마, 콩비지가 들어있는 보리밥 등이었다. 식사량 또한 많지 않았다.당시 조선인 징용공의 지도원으로 있었던 도쿠미쓰 마사히코(德光眞散彦)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처음 징용공이 온 것은 1944년 4월 혹은 5월로 그 다음에는 더운 시기인 7월이나 8월에 대규모로 들어왔다. 2000명 이상이었다. 전쟁 막바지에는 조선의 면사무소까지 연행하러 갔었는데 일본인 순사도 흉폭해져 있었다. 조선인 복장을 입고 있는 채로 데리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작업복은 3일을 입게 되면 구멍이 날 정도로 변변치 않았고 뜯어진 곳을 꿰맬 실이나 바늘도 없었기 때문에 그 대신 설탕봉투를 뜯어서 쓰게 했다."'히로시마제작소 50년사'에 따르면 공장의 건물은 거대했으나 기계 설비는 빈약했고 설비 공구가 완비되지 않은 상태여서 인해전술로 보충했다고 한다. 휴일은 한 달에 겨우 이틀뿐이었고, 철야와 장시간 잔업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놀라운 실적'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1945년 8월6일 7시30분.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신호가 울렸다. 아침 조례를 마친 노동자들이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북쪽 하늘에서 이상한 빛이 번쩍였다. 8시15분쯤이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공장 유리창이 깨지고 기둥이 부러지고 지붕이 기울었다. 기계에서 울리던 우웅하는 소리가 멈추고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부상자들이 줄줄이 실려나왔다.작업은 완전히 중단됐고 징용공들은 숙소로 돌려보내졌다. 공장 문 앞에는 시내에서 중상을 입은 사람들이 공장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으려고 떼를 지어 몰려왔다. 피투성이가 돼 업혀 온 사람, 들것에 실려 온 사람, 의복과 피부가 같이 타버려 화상으로 짓무른 사람.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히로시마 시내에 작업을 나간 조선인 동료들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5일 동안 동료들을 찾아나섰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 간논과 에바 두 공장은 폭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4㎞ 떨어져 있어 그나마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폭심지 반경 2㎞ 이내는 초토화됐다.8월6일 원폭 투하로 전체 징용공들이 피폭당했다. 하지만 미쓰비시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구조도 없었다. 머물 곳도 먹을 것도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조선인 징용공들은 자력으로 시모노세키(下關)나 하카타(博多)까지 이동해 배를 탔다. 하지만 귀국 도중 태풍으로 조난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후카가와 무네토시(深川宗俊)는 일본의 시인이다. 그는 1945년 당시 미쓰비시 징용공들의 지도원이었다. 1921년 히로시마에서 출생해 요코하마 포술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에 입대했다가 결핵으로 퇴역했다. 1945년 미쓰비시 중공업의 히로시마 기계제작소에서 조선인 징용공의 지도원으로 근무했다. 8월6일 조선인 징용공들과 함께 피폭당했고 이를 계기로 미쓰비시 징용공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했다.후카가와씨는 1996년부터 2008년까지 '미쓰비시 히로시마 전 징용공 피폭자 재판을 지원하는 시민 모임'의 공동 대표를 맡았다. 이 모임은 히로시마의 미쓰비시에 강제 징용됐던 한국인 피해자 여섯 명이 1995년 12월 히로시마 지방법원에 피해 회복 소송을 제기할 무렵에 결성된 단체다.후카가와씨는 일본이 패전하고 히로시마역에서 배웅했던 246명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들은 현해탄을 건너다 조난당했다. 1970년대 홀로 한국으로 들어와 징용공의 가족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녔고, 1976년 8월에는 나가사키현(長崎縣) 이키노시마(壹岐島) 모래사장에서 유골 발굴 작업을 진행해 시신 83구를 발굴했으며, 이들의 위령비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가해자로서 철저히 반성하는 삶을 살았다. 한국인 미쓰비시 강제 징용자들이 일본에서 재판하는 것을 적극 지원했고, 결국 2007년 11월1일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이끌어냈다. 이듬해 2008년 4월24일 한국인 징용공들과 함께 피폭당했던 후카가와씨도 눈을 감았다.1944년 8월1일. 경기도 이천에 살던 권영근씨는 일본 히로시마로 강제 징용됐다. 스물세 살 아내, 세 살배기 큰아들과 갓 100일된 작은 아들을 남겨둔 채 홀로 현해탄을 건넜다."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여러 풍파에 부딪히게 되는 법이라오. 나는 히로시마에 와 있으면서도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소. 고향에 돌아가게 돼 집 문 앞에 당도하는 그 순간이 어떠한 기분일까 상상해 본다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구려."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그리움이 묻어난다. 아내는 남편이 보낸 편지를 마음의 위안으로 삼으며 두 아이를 키워냈다. 하지만 권씨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광복 후 미쓰비시 중공업이 알선한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던 도중에 조난되고 말았다. 246명 중의 한 명이었다. 후카가와씨는 현해탄에 잠긴 미쓰비시 징용공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한밤에 밀려왔다 나가는 길에 이키노시마섬의 바닷가에 남몰래 흘러 들어와 밝히는 수많은 등불들" 이상훈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아시아 대표 석간 '아시아경제' (www.newsva.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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